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릴레오 갈릴레이 (문단 편집) == 업적 == [[아이작 뉴턴]]이 말하길, "내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봤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그 '''거인''' 후보 중에서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 특히 유일무이하게 뉴턴에게 관성에 대한 힌트를 주는 논문을 쓴 사람[* 갈릴레이는 천체의 움직임에 관한 논문에서 지동설 주장 뿐만 아니라, 천체는 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계속 그 궤도로 영원히 도는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을 써놨다. 물론 이쪽은 과학적 증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후배 철학자 뉴턴에게 결정적 힌트였을 거라는 설이 많다. ]이다. 우연히도 갈릴레오는 뉴턴이 태어나기 바로 전 해에 사망했다.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로 보는 건 [[아이작 뉴턴]]에 의해 고전물리학이 성립된 이후의 사후적 평가이다. 당대에는 저명한 [[수학]]자였으며, 직업면에서도 수학자로 커리어를 쌓았다. 당시에 수학자는 천상이자 논리의 학문인 천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되었고, 이에 갈릴레오의 업적은 직업면에서는 평가하자면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수학적으로 천문학의 원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피터 디어, 2011. 《과학혁명》, 뿌리와 이파리)[* 하지만 수학적으로 천문학을 재구성하려고 한 동시대의 인물로는 [[요하네스 케플러|케플러]]도 있으며 케플러는 '케플러의 법칙'을 만들어서 이름을 남긴 반면, '갈릴레오의 법칙' 같은 건 없다. 지동설 또한 갈릴레오의 오리지날은 아니다.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받고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감과 투쟁심을 안겼지만, 그것 역시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갈릴레오를 이토록 유명하게 만든 최대의 공로자는 [[우르바노 8세]] 교황일지도 모른다.] [[천동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저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종교 권력에 대항한 과학의 순교자 정도로 인식하곤 하는데,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 자세한 건 [[천동설]] 문서로. 유명한 일화로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통념을 깨기 위한 것으로,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를 동시에 낙하시켜서 두 추가 동시에 지면에 떨어지는 것으로 증명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갈릴레오가 한 실험은 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고도의 [[사고실험]]이었다'''.[* 사실 이 자유낙하 통념에 대한 비판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이미 지적된 것이었고, 갈릴레오도 비잔티움 제국 때 제기되었던 지적을 참고로 고도의 사고실험을 한 것이었다.] >만약 무거운 물체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떨어뜨리는 경우를 고려해 본다면,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려 하고 가벼운 물체는 그보다 늦게 떨어지려 할 것이므로, 그 결과는 처음의 무거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늦고, 가벼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빨리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물체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전체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서 더욱 빨리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도 나온다. [[귀류법|하나의 가정에서 이처럼 상반된 두 결론이 나왔으므로,]] 그것은 애초의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동시에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 -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中 갈릴레오는 사고실험만 한 것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려고 했다. 갈릴레오는 길다란 판자에 홈을 만들어 놋쇠의 철구를 굴려 낙하에 필요한 시간을 측정하여 이론에 대한 실험근거를 제시했다. 다만 [[과학사학]]자 버너드 코헨은 "시간 측정을 '''자기 맥박'''으로 했다"면서, "이 실험은 갈릴레이가 실험 결과를 사전에 얼마나 확고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에 불과하다" 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험에 있어서 누구나 가설을 세우고 기대한다는 점과 그 때 '초단위'로 시간을 잴 수 있는 기계식 시계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가 가진 자원을 가지고 실험을 통해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과학적 실험이다.[* 물시계로 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 있는데, 물시계로 하는 것이나 맥박으로 하는 것이나 오차는 있다. 물론 이것은 얼마 정도의 정확성을 과학적 실험으로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지금의 원자시계에 비하면 앞의 실험들이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과학 혁명]] 시대의 모든 실험과 오차들도 제대로된 실험이라고 보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가 과학 실험을 그가 가진 자원하에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 그런 실험이 역사상에서 최초였다는 점, 또한 쉽게 따라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남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떨어지는 물체의 속력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수식으로까지 나타냈으나, 정작 왜 그러한 방식으로 늘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아예 호기심을 갖지 않았는데, 힘이라는 관점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훗날 갈릴레오의 이론은 [[아이작 뉴턴]]이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미래에 [[아폴로 15호]]의 승무원들이 달에서 실험하여 이를 입증한다. ||{{{#!wiki style="margin:-5px -10px" [youtube(KDp1tiUsZw8)]}}} || ||당시 실험 영상.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 깃털을 들어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 이후 BBC에서 [[NASA]]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진공 실험실을 방문해서 실험한 영상 (2분 45초부터) ||{{{#!wiki style="margin:-5px -10px" [youtube(E43-CfukEgs,start=165)]}}} ||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찰했으며 '''[[목성]]의 [[위성]] 4개'''를 비롯한 수많은 위성과, '''[[토성]] 고리'''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또한 '''[[금성]]의 위상 변화'''도 관측했다. 당시 [[파도바 대학교]]의 수학 교수이던 갈릴레오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당시 세속 군주이던 [[코시모 2세]]의 아버지 [[코시모 1세]]는 제우스에 비유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4명이었다. 갈릴레오는 당시의 신화적 의미와 발견을 결합시켜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다.] 궁정의 후원을 얻었다. 참고로 그때 갈릴레오의 연봉은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학계에는 신학/철학/수학으로 나눠지는 일종의 위계 질서가 있었다. 이중 수학자는 카스트 수준의 하위층(?)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수학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봉급이 8배까지 차이 났다. 갈릴레오는 수학 교수였고, 이 때문에 갈릴레오가 발표하는 천문학 주장들은 다른 학자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더욱이 천문학은 신학/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직 신학자나 철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이라는 고정관념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얻으려 했고, 결국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유명한 건 '''지동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여러 상황들 탓에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며 어쩔 수 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을 중단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관성]]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았으나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등속직선운동이 아니라 등속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관성이 등속직선운동이라는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나왔다.] 그 외에도 '''최초로 온도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기압 때문에 정확한 온도는 측정하지 못하여 유용하지는 않았다.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성(건축)#s-3.4|요새]] 건축 능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